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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퍼온 글이다. wikipedia: FC Barcelona 항목보다 더 자세하게 잘 설명돼 있어 퍼왔다.
- 400번째 포스팅 기념 글. 난 평생 바르싸만 좋아할거야.
1. 들어가며
1899년 11월 29일 한스 감퍼는 풋볼 클럽 바르셀로나(Futbol Club Barcelona)를 설립했다. 11명의 선수와 열광적인 팬들이 함께하는 축구는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 알려진 운동경기는 아니었다.
축구가, 그리고 클럽이 그동안 어떻게 발전해왔고 얼마나 중요한 종목으로 성장했는지 그는 절대로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100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FC 바르셀로나는 모든 영역에서 거대하게 성장해왔고, 여타 스포츠 클럽들보다 훨씬 커다란 발전을 성취해와서, 이제 '클럽 그 이상'이라는 클럽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
전세계에 산재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바르싸는 단지 스포츠 클럽이 아닌 자아 정체성의 상징이 되었다. 오늘날의 바르싸는 스포츠 영역을 벗어나 사회, 정치, 문화의 일부다. 가장 힘든 시간들을 거치면서 바르싸는 까딸루냐와 까딸루냐 인들의 자유를 향한 열정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 때 형성된 상징들은 지금도 면면이 이어져 클럽과 그에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스페인에서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바르싸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민주적인 클럽이다. 그리고 바르싸는 유니세프와의 스폰서쉽을 체결함으로써 전세계에 있는 어린이들을 돌보는 데에 신경을 기울이는 클럽으로 알려지게 된다.
한 세기동안, FC 바르셀로나는 영광과 시련의 나날들을 거쳐왔다. 그 중에는 성공의 시기가 있고, 덜 성공적이었던 시기도 있으며 극적인 승리의 순간도 최악의 패배를 끌어안은 순간도 있다. 그렇지만 이 모두가 어우러진 것이 지금 클럽의 개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클럽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들이 있다.
2. 기원 (1899-1922)
빈테르투르(Winterthur)에서 1877년 11월 22일에 태어난 사업가 한스 감퍼(Hans Gamper)는 바르셀로나에서 축구 클럽을 시작해보려고 결심한 사람이었다. 1899년 10월 22일 그는 지역 스포츠 잡지에 선수를 모으는 광고를 낸다.
바르셀로나에서는 호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감퍼는 1898년에 사업상의 이유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의 광고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 약 한 달 가량이 지난 1899년 11월 29일에 그는 힘나스 솔레에서 열린 클럽의 첫 번째 회의를 진행했다. 감퍼와 함께 역사적인 첫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은 괄테리 와일드(Gualteri Wild), 유이스 도쏘(Lluis d'Osso), 바르토메우 테라다스(Bartomeu Terradas), 오토 쿤츨(Otto Kunzle), 오토 마이어(Otto Maier), 엔리치 듀칼(Enric Ducal), 페레 카보트(Pere Cabot), 카를레스 푸홀(Carles Pujol), 호셉 요벳(Josep Llobet), 존 파슨스(John Parsons), 윌리엄 파슨스(William Parsons) 등이었다. 그 회의에서 클럽을 결성하기로 결정이 났고, 영국인인 괄테리 와일드는 초대 회장이 됨으로써 그는 선수로 뛰는 것에 더해서 행정적인 업무를 맡게 되었다. 와일드는 다른 설립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류 선수이기도 했던 것이다.
최초의 유니폼
클럽을 시작할 때부터 선수들은 파란색과 자홍색이 교차되는 것으로 유명한 블라우그라나를 입었다. 한 쪽은 파란색이 다른 한 쪽은 자홍색이 들어가고 소매쪽 부위부터는 다시 반대의 색이 교차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하얀 반바지를 입었다.
최초의 클럽 앰블럼
클럽의 역사가 처음 시작될 때에는 바르셀로나 시 당국의 위임을 받아서 도시의 문양을 그대로 사용했다. 1910년에 운영진은 클럽이 자신들의 앰블럼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고 최고의 도안을 찾기 위해 경합을 붙였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에 채택되었던 문양의 기본적인 틀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시합
클럽이 치른 최초의 경기 상대는 지금은 투로 공원으로 알려진 보나노바에 살던 영국인 이주자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바르싸 선수들도 멤버로 포함되어 있던 영국인 이주자 팀이 1-0으로 이겼다.
최초의 경기장
바르싸는 초기에 영구적으로 쓸 홈 경기장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결과 1900년에는 호텔 카사노바스에 있는 곳을 썼다. 1901년부터는 라 카레테라 도르타(la carretera d'Horta)를, 1905년부터는 엘 카레르 문타네르(el carrer Muntaner)를 썼고, 클럽이 최초로 소유하게 된 경기장은 카레르 인두스트리아(carrer Industria)로 6,0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하게도 계단식 스탠드가 설치된 경기장이었다. 공식적으로 개장한 것은 1909년 3월 14일이었는데, 그 때는 이미 클럽이 타이틀을 모으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코파 마카야를 우승한 1901-02 시즌, 까탈루냐 챔피언쉽은 1904-05 시즌과 1908-09 시즌에 거머쥐었다. 새로운 시설에서 타이틀 획득에 박차를 가한 클럽은 계속해서 우승컵을 쓸어 담았다. 1909-10, 1910-11, 1912-13, 1915-16, 1918-19 1919-20, 1920-21, 1921-22 시즌에 까탈루냐 챔피언 자리에 올랐고, 1909-10, 1911-12, 1912-13, 1919-20, 1921-22 시즌에는 스페인의 챔피언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클럽은 스포츠와 사회 각 분야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즐거운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설립자, 호안 감퍼
1877년 11월 22일에 스위스 빈테르투르에서 태어난 한스 감퍼의 어린 시절은 스포츠가 항상 곁에 있었다. 그는 육상, 사이클, 축구 모두 열심히 했고, FC 취리히를 창단하기도 했다. 그는 20살에 바르셀로나로 이주했고, 다른 이들과 스포츠를 통해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바르싸를 설립하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인기를 유지하는 축구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01년에 훌륭한 선수이기도 했는데, 팀이 넣은 88골 중에 49골을 마무리하는 활약을 펼쳤다. 그는 1903년까지 선수 생활을 계속했고, 1908년에는 처음으로 해체 위기를 겪었던 시기에 클럽을 지켜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회장에 취임했다. 호안 감퍼는 1925년까지 다섯 번 회장이 되었다. 감퍼 자신은 완전히 까탈루냐와 일체가 되었다. 까딸란으로 말하는 것도 글쓰는 것도 그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1925년 그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정권의 억압을 받게 되었다. 그 독재자가 레알 마드리드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1930년 감퍼는 다시금 사업상 좌절에 맞닥뜨리게 되었고, 결국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3. 레스 꼬르츠에서 누 캄프로 (1922-1957)
레스 꼬르츠(Les Corts) 스타디움은 1922년에 완공되었다. 이 경기장의 건설로 클럽은 10년간의 황금기(1919-1929)를 비롯하여 성공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 환상적인 시기는 30년대의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그 때 경기장은 파시스트 독재자인 프리모 데 리베라에 의해 폐쇄되었고, 내전 시기에는 병영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레스 꼬르츠 스타디움은 다시금 도약한 바르싸의 훌륭한 시기에도 함께 했는데, 그 때 바르싸는 다섯 개의 컵을 획득하였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해서 회원수는 크게 증가해서, 1944년에 2만 명이었던 회원이 1950년에는 3만 명을 돌파했다. 1920년대의 사미티에르, 1950년대의 쿠발라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이 이 경기장을 빛내며 블라우그라나 역사의 면면을 아로새겼다.
영광스러운 시기의 개막 ― 엘 캄프 델스 꼬르츠
1919년부터 1929년까지의 10년간은 클럽의 황금기로 기억된다. 그 때 팀에는 사미티에르(Samitier), 알칸다라(Alcantara), 사모라(Zamora), 사기(Sagi), 삐에라(Piera), 산초(Sancho)와 같은 선수들이 기량을 뽐내며 관중들을 열광시켰고, 클럽은 이후에 특히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될 때의 원인이었던 까딸루냐 민족주의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채택하였다.
1922년 5월 20일은 새로운 레스 꼬르츠가 선을 보이는 날이었다. 그 곳은 오래지않아 '축구계의 대성당'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레스 꼬르츠는 3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이었는데, 최종적으로는 최초 수용인원의 두 배에 달하는 60,000명을 수용하도록 확장되었다. 1924년에 있었던 클럽 창립 25주년 기념행사―발렌시아의 화가 호셉 세그레예스(Josep Segrelles)가 포스터를 그린 것으로도 유명한―에서 바르셀로나는 총 12,207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고되었고, 전도유망한 클럽으로서의 기반을 다져갔다. 5년 뒤 1928-29 시즌에 바르싸는 처음으로 스페인 리그 타이틀을 따냈고 그것은 이 시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리그 타이틀을 따내기 전까지 바르싸는 까딸루냐 챔피언쉽에서 1923-24, 1924-25, 1925-26, 1926-27, 1927-28 시즌까지 내리 우승컵을 손에 쥐었고, 스페인 챔피언쉽에서도 1924-25, 1925-26, 1927-28 시즌의 우승자였다. 마지막 승리는 레알 소시에다드를 꺾었던 두 번의 승리를 재연하는 것이었다. 바르싸 키퍼인 프란츠 플라츠코(Franz Platko)의 영웅적인 활약에 힘입어 승리를 거머쥐었고, 이때의 승리는 라파엘 알베르티가 시를 지어서 기리게 되었다.
어려운 시기
영광스러운 20년대 중반에 바르싸는 스포츠 이외의 문제로 탄압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다가올 시기의 어려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25년 6월 14일 프리모 데 리베라(Primo de Rivera)의 독재정권이 한창이던 시절 경기장에 모인 관중들은 까딸루냐 국가를 부르면서 스페인 국가가 나오자 야유를 보냈다. 정부는 그 보복으로 경기장을 6개월동안 폐쇄한다는 조치를 내렸고(나중에는 3개월로 줄어들었다) 감퍼에게 회장직을 물러나도록 종용했다. 5년 뒤인 1930년 7월 30일 클럽의 설립자가 죽었다. 비록 클럽은 여전히 벤톨라(Ventolra), 라이치(Raich), 에스꼴라(Escola)와 같은 돋보이는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스포츠 외적인 정치적 탄압의 뒷그림자에 가려져서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바르싸는 세 가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재정적 위기, 사회적 위기, 그리고 성적. 회원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비록 팀은 까딸루냐 챔피언쉽에서 1929-30, 1930-31, 1931-32, 1934-34, 1935-36, 1937-38 시즌 내내 우승을 거두었지만 스페인 전국적인 단위의 대회에서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내전의 영향
내전이 발발한지 한 달 뒤에 바르싸 회장인 호셉 수뇰(Josep Sunol)은 과달라하라 근방에서 프랑코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다행히도 팀 멤버들은 당시에 수익 마련을 위해 멕시코와 미국으로 투어를 떠난 상태였는데 결과적으로는 팀원들 중에 절반이 멕시코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38년 3월 16일에 파시스트들은 클럽의 소시오들이 모이는 클럽에 폭탄을 투하해서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다. 몇 달 뒤 바르셀로나는 파시스트들에게 점령당했고, 까딸루냐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던 클럽은 회원이 3,486명까지 감소해서 심각한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1940년 3월에 프랑코 정권의 측근 인사인 엔릭 피녜이로(Enric Pineyro)가 회장으로 지명되었다. 동시에 클럽의 이름은 애초에 영국식으로 작명되었던 Futbol Club Barcelona에서 스페인식 작명법인 Club de Futbol Barcelona로 바뀌게 되었다(최종적으로 이름을 다시 찾게 된 것은 1973년이다). 그리고 문양에 포함되어 있던 까딸루냐 깃발의 상징인 네 개의 빨간 줄은 1949년 원래의 모양을 되찾기 전까지 두 개로 줄어들었다.
강등 위기에서 코파 라티나 우승(1949)까지
40년대는 클럽이 점진적으로 위기에서 회복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42년 그들은 스페인 컵을 거머쥐었지만 리그는 거의 강등될 뻔했다. 그 다음 시즌은 마드리드와의 수치스러운 경기로도 기억되는데, 이 때 바르싸 선수들은 심판, 경찰로부터 협박을 받으며 경기를 했다. 피녜이로는 파시스트였지만, 당시 바르싸 선수들에게 가해졌던 행위들에 역겨움을 느끼고 클럽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1944-45, 1947-48, 1948-49 시즌에 스페인 리그를 우승하고 1949년에 코파 라티나를 차지하면서 바르싸는 최종적으로 그들 뒤에 수년간 놓여있었던 위기에서 재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르싸는 1949년 5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회원 수는 24,893명이었고, 그 때까지 21번의 까딸루냐 챔피언, 9번의 스페인 컵, 4번의 스페인 리그 타이틀을 획득했다.
쿠발라와 다섯 개의 컵
라디슬라우 쿠발라(Radislau Kubala)가 1950년에 바르싸에 도착하면서 바르싸는 레스 꼬르츠 경기장으로는 감당이 안될만큼 성장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1951년에서 1953년 사이 바르싸는 거머쥘 수 있는 모든 타이틀을 따냈다. 스페인 리그에서는 1951-52, 1952-53 시즌 모두를 우승했고, 스페인 컵에서는 1951, 1952, 1953년의 우승자가 되었다. 1951-52 시즌동안 팀은 다섯 개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스페인 리그, 스페인 컵, 라틴 컵, 에바 두아르테 컵, 마르틴 로씨 트로피. 바소라(Basora), 세자르(Cesar), 쿠발라, 모레노(Moreno), 만촌(Manchon)이 이끌었던 당시의 공격진은 지금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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